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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강해

마태복음 4장 1-11: 광야에서의 시험

by 보석상자 2022. 6. 2.

광야에서의 시험 (마 4:1-11)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장엄한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의 기적이나 과시 기적으로 입증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가 세계 지배관을 넘겨받는 데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데서 입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해 시작합니다.

 

1.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

 

1) “그때에”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합니다.

 

2) “성령에게 이끌리어”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 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 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십니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인을 받으며 참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 “마귀”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사탄)을 번역한 말입니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 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들의 왕입니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 요, 거짓말쟁이(요 8:44) 요, 시험하는 자(살전 3:5) 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 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릅니다.

 

4) “시험을 받으러”

 

'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5)일 뿐 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결단의 시험이었습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할 뿐 아니라(계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습니다.

 

5) “광야”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마12:43;계18:2)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 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합니다(수 16:1).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합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지역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2)

 

1) “사십 일을 밤낮으로”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됩니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습니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됩니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영적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습니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2) “금식하신 후에 주리 신지라”

 

예수께서는 40일 밤낮 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하셨습니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 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지경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습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습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간교한 사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3)

 

1) “시험하는 자”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입니다. 이 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사건은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입니다.

 

2) “나아와서”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습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의심했거나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즉 사단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의심했다기보다 그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가 드러났습니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메시아적 권능을 메시아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이 당면한 개인적 문제(허기)를 해결하는 것에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입니다.

 

이때 만약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

 

1) “기록되었으되”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2)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구절은 70인역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에 적용되었습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사람'의 존재 양식,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반박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 된 경전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그 자체인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합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5)

 

1) “데려가다”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 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킵니다.

 

2)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이 확실하며,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 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아성에 오점을 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3) “세우고”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 했습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습니다.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

 

1) “뛰어내리라”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아를 고대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인 것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아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인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2)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습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 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가 됩니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낚아채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상기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게 적절하게 적용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표적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였느니라] 하신대(7)

 

1) “또 기록되었으되”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적 설명 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입니다(벧후 3:16).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 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 사건에 근거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입니다(신 6:17).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 말라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 '죽을까 하노라')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8)

 

1) “지극히 높은 산”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합니다.

 

2) “천하 만국과 그 영광”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천하 만국은 초자연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를 버리고 후자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16:23).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

 

1) “경배하면”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닙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당착입니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 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였습니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킵니다.

 

2) “네게 주리라”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합니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 16:11), 공중의 권세 잡은(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 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입니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1) “사단아 물러가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에 찬 예수의 명령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인 '사단'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15;눅22:3;요 13:27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아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12:25-2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입니다(고전 15:25, 26).

 

2)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라”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1 계명과 제2 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한편 여기서 '경배'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를 갖추는 행위입니다.

 

한편 70인 역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 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뜻으로 '경외'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섬김'이란 원래 고용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경배'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 교환적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합니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 하나님만을 섬겨야 되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 드니라](11)

 

1)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위 앞에 마귀는 참패한 채 그분에게서 패퇴해 갔습니다. 여기서 '떠나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 드니라”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수종 들다'는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계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왕상 19:6, 7).

 

따라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 때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을 들었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은 우리가 휴거 될 때까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하나의 성화 과정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또는 사탄이 주는 시험을 피할 수 없다면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겨내신 방법 즉, 말씀으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