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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강해

마태복음 3장 1-12: 회개에 합당한 열매

by 보석상자 2022. 5. 31.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 3:1-12)

 마태복음 3장부터는 마가복음의 진술을 토대로 합니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성경 강해 시작합니다.

 

1.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1절)

 

1) “세례요한”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2) “전파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입니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말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입니다.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2절)

 

1) “회개하라”

 

이 말은 원어상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는 백성들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 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입니다.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격적인 참회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번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만 참 회개임이 증명됩니다.

 

2)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요한의 설교의 두 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나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합니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왕국'의 의미는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합니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메시아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입니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 때문일 것입니다.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1)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됩니다. 또한,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로 묘사되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습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사 40:3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입니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 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아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는 원어상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 중 제3 계명(출 20:7)의 금기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 명칭인 것입니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습니다'(요 14:2, 3).

 

4) “첩경을 평탄케 하라”

 

여기서 '첩경'은 곧게 뻗은 대로를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말은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입니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 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절)

 

1) “약대 털옷”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 본연의 모습을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 자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합니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습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 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합니다.

 

2) “가죽 띠”

 

풍성한 겉옷을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3) “메뚜기”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습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습니다.

 

3) “석청”

 

석청은 야생 꿀로써 나무의 수액이라는 견해도 있고, 야생 벌꿀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됩니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입니다.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5절)

 

'이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킵니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아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지명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 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6절)

 

1)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 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습니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편 막 1:4와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메시아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요단강”

 

히브리어 원어상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합니다. 이 강은 헤르몬 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입니다. 요단의 수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됩니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입니다.

 

3) “세례를 받더니”

 

할례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 안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합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 받음으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또한 쿰란 종파는 제의적 부정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 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던 것입니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1)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성별 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외모를 중시하는 외식 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눅11:43,44;12:1).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표리부동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2) “사두개인”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3) “오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납니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되니. 실로 이 두 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던 것입니다 (16:1;22:23, 34;행 4:1).

 

4) “독사의 지식들아”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입니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입니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5)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인 것입니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습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러운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 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적대적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입니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계 6:16, 17).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8절)

 

본문은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알려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한'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 의로운 일들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대다수가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 구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합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는 것입니다.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

 

1)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롬 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이 동일하게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 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2) “이 돌들로도”

 

이것이 요한의 발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과 '돌들'은 동음이의어로 풍유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발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롬 4:17). 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 우리라](10절)

 

1)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메시아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 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이른 것(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습니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놓였으니'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합니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 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불에 던지 우리라”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입니다(히 6:8).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11절)

 

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본 구절에서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 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 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즉 그의 '물로'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 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내 뒤에 오시는 이”

 

'내 뒤에')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입니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합니다. '오시는 이'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아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아 쓰시는 도구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입니다.

 

3)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16:24). 특히 '능력 있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는 능력의 자의적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 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닌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4) “그의 신을 들기도”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습니다.

 

5)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사 6:5).

 

6)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습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 가고 그 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입니다.

 

둘째,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여기서 물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인 것입니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닌 것입니다.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

 

먼저 '키'는 풍력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바구니입니다. 한편 '손에'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인 것입니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입니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아는 '타작마당'(시 1:4;사 5:24;단 2:35)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 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모아' 취급할 것입니다.

 

한편 '곡간'은 중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편 '정하게 하사'의 '디아'와 '태우시리라'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세례요한은 종말 심판이 임박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열매는 본문에서 단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열매가 새로운 삶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세례 요한이 목소리 높였던 종말과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주의 공중 강림과 휴거를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