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부인(마 26: 63-75)
1.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이것은 예수께서 과연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책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예수를 판자는 가룟 유다였지만 율법의 교묘한 올가미와 교권 주의자들의 사악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처형할 합법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마련한 자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입니다.
가야바는 이 적나라한 질문을 통해 신성 모독의 범죄를 찾고자 했으며 정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찾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가야바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은 네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산적 속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물음은 네가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지 질문한 것입니다.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관한 가장 은밀한 신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비록 지금은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 당신의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변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변화산상에서 그 전조를 보이신 바 있습니다(17:2-13). 진정 그 당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교권 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 이후에 전개될 영광스러운 장면들을 예언적으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의 영광스런 장면, 곧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와 같은 선취적인 고백은 대제사장을 깊이 당황케 했을 것이며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진정 '네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는 볼 것이다'는 예수의 권위에 찬 응답은 그의 현재의 권위를 확인하고 장차 있을 그의 영원한 왕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의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 행위와 통치권을 전해 받으실 것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의 동격을 이루실 예수의 신적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단 7;13, 14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실 예수의 최고의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즉, 곧 있을 예수님의 공중 강림과 휴거 사건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사실상 동일시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이전의 주장만큼이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들에게 확실한 고소거리를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3.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69)
“바깥 뜰에 앉았더니” 이 구절은 본래 58절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연결해보면 자연스럽습니다. 다시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궁 내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 수비대의 경비에 의해 예수가 심문받고 계신 궁전의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궁궐이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궁전 안마당에 앉아 산헤드린의 판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에 등장하는 한 비자는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베드로를 궁내로 들어가게 한 여자 문지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 18:16, 17). 그 여자 문지기는 아마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막 14:67)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합니다. 결국 이 두 표현(나사렛, 갈릴리)은 지리적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심히 멸시적인 용어입니다(요 :46).
여하튼 그 '비자'는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자 그가 심히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자기와 안면이 있는 요한과 그가 함께 궁내로 들어왔음을 보아 적어도 그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는 예상을 하게 된 듯합니다.
4.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70)
본 구절에서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수의 말씀 곧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씀과 연관 지어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진정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장면에 직면한 베드로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공개적으로, 예수와 자신의 관계성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은 마치 공식적인 법정에서의 선서와 유사한 형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거짓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이자 기독교 교회의 반석이라고 할 만한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될 장면인 것입니다. 한편 이 베드로의 치욕스러운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였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매사에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71)
본 구절에서 '앞문'은 가야바 궁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불빛이 그곳까지 잘 미치지 못하는 출구였을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아마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도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否認)은 '다른 여종' 앞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같은 '여종'앞에서 진행된 듯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막 14:69).
요한복음에는 '여종' 앞에서 부인한 적이 없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 부인한 것 가운데 맨 처음만 '여종' 앞에서 했을 뿐 나머지 두 번은 다른 사람(남자) 앞에서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이 여러 사람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된 뒤에 된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여하튼 베드로는 밝은 곳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도 괴로운 질문을 피하기에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와중에 자정이 지났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 14:30).
6.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72)
본 구절에서 '맹세'는 어떤 자기 진실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선언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으로서, 이는 베드로 자신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주를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떤 거룩한 것에 호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첫 번째 부인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는 경멸적 표현으로 부인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7.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73)
1) 조금 후에 -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2:59). 이 시간 동안 예수는 공회에서 사형 언도와 하속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나신 후 안 뜰을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송 된 듯하며, 어쨌든 거듭되는 위험의 증대와 부인 가운데서도 아직 예수의 신상이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는 베드로의 인간미가 엿보입니다.
2) 곁에 섰던 사람들 -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이 무리 중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전합니다(요 18:26). 아마 그 친척은 불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와 한 통속인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말고의 일로 조금은 흥분된 감정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3) 진실로 그 당이라 -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가 됩니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추측에서 확신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의 말투는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감출 수 없게 하였습니다.
4)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북부 갈릴리 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대지방의 말과 현저하게 달라서 금방 구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8.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74)
베드로는 처음에는 부인, 다음에는 맹세로 부인, 그 다음에는 저주로 부인하게 됩니다. 이는 죄악과 위선의 가속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들은 예수의 결정적인 고백에 맞서 있습니다.
즉 예수의 진실한 고백은 사형을 초래한 반면에 베드로의 세 차례 거짓 고백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도들이었습니다. 정녕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신성 모독의 중한 죄악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만 것입니다.
더불어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립니다. 새벽이 되기 전 닭은 두 번 울어댔습니다(막 14:72). 한편 이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의 혼란스럽고 완악해진 마음을 돌이켜 참회의 눈물로 변화시킨 일종의 신선한 경종이었을 것입니다.
9.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75)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이 말씀은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실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조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 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가 회개의 자리로 돌아서게 됩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몇 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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