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강해

마태복음 27장 32-4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by 보석상자 2022. 6. 1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마 27:32-44)

1.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1) “나가다가”

 

이 말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인데,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히 13:13).

 

2)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이 사람은 리비아 서북 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 소속된 일원이었던 것 같습니다(행 11:22;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 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축복을 받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2.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골고다'라는 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에서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가장 가능성 있게 생각되는 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 '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29절),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절)에 위치한 곳으로 예상됩니다.

 

3.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1) “쓸개 탄 포도주”

 

이는 시편 69:21을 반영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물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차이는 아람어의'물약'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담'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란 진짜 '쓸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쓴 맛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는 매우 센 독주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취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입니다.

 

 (2) 술로 인해 거의 마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라 합니다.

 

2)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 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 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조차도 친히 감수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잔'을(20:22;요 18:11)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4.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1)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었던 형벌입니다.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다음과 같이 진행이 됩니다.

 

 (1) 먼저 공식적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합니다.

 

 (2) 형장으로 가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게 합니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깁니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우게 됩니다.

 

(5) 그런 상태로 계속 버려두어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데,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야 숨이 끊긴다고 하며, 이때 각종 야수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 뜯어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6)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인 외상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리는데, 이때 외관상 죽은 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합니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거나 못 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 박혀 달리신 예입니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 또는 T자형, + 자형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었으며,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형임으로 예상합니다(37절).

 

2)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 뽑았을 것이며, 이것은 시 22: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함으로써(막 15:25) 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5. [거기 앉아 지키더라]

 

저들이 사형수들을 지키는 까닭은 누군가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합니다.

 

6.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죄패에는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형법상 한 관례였습니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막 15:26; 눅23:38; 요 19:19).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을 통하여 자신의 반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 간의 반목 상태를 조롱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습니다(요 19:20).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빼앗고, 옷을 벗긴 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에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합니다(요 19:21).

 

7.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십자가형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역설적으로나마 '십자 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시편 22:7에 언급된 사람마다 머리를 흔들며 빈정대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사형 언도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 성내의 주민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흔드는 행동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시 109:25; 애 22:15).

 

여하튼 유대인들은 다시 산헤드린 재판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26:67,68) 사악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잔인함과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여 돌이킬 수 없는 참람한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9:3;12:31;26:65).

 

8.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1)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그것을 지으려 했던 자여'가 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성전을 문자 그대로 헐고 다시 3일 만에 복원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요 2:19-22).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는 이미 가야바의 질문인 동시에 사단의 질문이기도(4:3, 6) 한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가는 행인을 통하여 사단은 여전히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고통을 회피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입니다(16:21-23).

 

실로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쉽게 접근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미혹하려 드는 것이 사단의 속성인 것입니다(벧전 5:8).

 

3)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잘못된 메시아사상에 짙게 물들어 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요구였습니다. 즉 그들은 적어도 메시아라면 각종 이적과 영웅적 활동을 전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능히 그럴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26:53)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해두신 자기희생을 통한 만인 구원에의 길을 지금 가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16:23).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라는 그들의 요구는 40절에 나온 행인들의 사단적 요구와 일치되고 있습니다. 실로 그들은 믿기 위해 이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대변자로서 예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의혹과 또 그런 자를 처형시킨 승리감에 도취되어 또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 같은 자신에 찬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9.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때 그것이 그가 메시아로써 동시에 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메시아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모든 일을 성사시켜주실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구세주가 아닌 결론을 이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단정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혹독한 시련, 곧 하나님의 버리심의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써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분명히 증거 하셨습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0.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주위를 둘러싼 모든 군중들이 예수를 비난한 것을 보고 있던 강도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에 그들마저도 예수를 희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난했던 두 강도중 하나는 예수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거룩하심에 감동을 받아 멸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눅 23:3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