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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강해

마태복음 28장 11-20: 예수님의 지상명령

by 보석상자 2022. 6. 18.

예수님의 지상명령 (마 28: 11-20)

 

1.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11)

 

1) “여자들이 갈제”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됩니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 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달려갔습니다.

 

2)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쁨의 소식과는 다르게 무덤 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전해질 소식은 불길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 무덤 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수꾼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냅니다.

 

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12)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부활을 은폐하고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짜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파수꾼들을 매수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13)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납니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 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을 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습니다.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14)

 

1) “총독에게 들리면”

 

이는 군대의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군인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는 말입니다.

 

2) “우리가 권하여”

 

유대 지도자들은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2)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 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 또한 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5)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하고 있습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16)

 

1) “열 한 제자”

 

27:5에서 기록 된 대로 열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 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2) “갈릴리에 가서”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셨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마지막 선교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입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3)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이 산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 몇 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산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말씀이 선포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이었기 때문입니다(5:1; 8:1).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 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되는 것입니다(10절).

 

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17)

 

1) “예수를 뵈옵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 여 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목도하였을 것입니다.

 

2) “경배하나”

 

`경배하나'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공동 번역 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상의 승리로 인해 만국의 왕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3)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 구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첫 번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 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입니다.

 

여기서 `경배하나'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면 `11 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 했을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되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8절).

 

두 번째 난제는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 사용된‘의심하다’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 제자가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 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11 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 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했을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

 

1)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예수께서는 당신에 대한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실추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입니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습니다. 이 `모든'은 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을 의미합니다.

 

한편 여기서 권세는 절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온 우주의 권세를 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 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이 새롭게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한때 조롱과 핍박과 고난을 당하신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19)

 

1) “너희는 가서”

 

여기 `가서'는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이해됩니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를 삼아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을 따라야 하고,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인 것입니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 구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란 죄 사함을 받고(막 16:16) 메시아의 게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1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0)

 

1)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복음 전파' 그리고 `병 고침'의 예수님의 3대 사역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한편 `가르쳐'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인 것입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딤후 2:2).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습니다.

 

 2) “볼지어다”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말로서, 예수께서 지상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3)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1:23).`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분은 잠시 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 까지'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키고 있는 것입니다(24:3).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 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의 기간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