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대환난 (마 24:15-27)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15)
1) “다니엘의 말한 바”
본문은 단 9:27 ; 11:31 ; 12:11의 70인 역(LXX)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용입니다.
2) “멸망의 가증한 것”
이는 단 11:31 ; 12:11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 경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를 폐하고 우상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을 더럽히겠다는 말입니다.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가증한 것'은 여호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신성 모독과 연관됩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말은 원어상 원뜻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 '혐오스럽다'입니다. 실로 하나님께 우상과 거짓 사술 등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의'란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이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다니엘서의 이 말은 분명. B.C.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통해 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거룩한 곳이 황폐되고 치욕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내용이 갖는 의미는 신앙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전(殿)인 인간의 내면을 공격하며 파괴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활동을 상징하거나 적그리스도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살후 2:4, 8).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현재 하나님의 전인 교회인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100. 씬입니다. 이 액체 안에 유전자 변형물질이 들어있기에 이것으로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3) “거룩한 곳”
앞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정관사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한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회당까지도 포함한 신앙의 중심지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앙인의 마음속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한편 평행 구를 이루는 눅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라고 표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거룩한 성전에 대한 유린을 멸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4)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언한 바를 어떤 영적 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이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고지, 즉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단 9:25 ; 12:10)는 말처럼 예수께서 친히 경고적, 교훈적 메시지로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6)
1) “유대에 있는 자들은”
닥쳐올 재난이 단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 구절입니다.
2)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유대인들에게는 산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로 생각하였습니다(시 11:1). 또한 구약시대 때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고(출 19:1-2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핵심 설교인 산상 수훈도 역시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5-7장).
지금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는 곳도 바로 산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산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반영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이와 같은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거룩한 곳이 더럽혀지고 성전이 유린당했을 때, 즉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속히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도망은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17)
1)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유대인들의 가옥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하여, 주로 기온이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신 22:8). 그리고 이 지붕에는 지상과 연결된 두 통로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지붕에서 집 외부로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붕에서 그 집 내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2)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이는 재난을 만난 사람이 취할 태도로서 결코 집 안 귀중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먼저 생명부터 보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각종 난리와 폭동이 겹쳤는데(6절), 이때 민첩한 도피가 필요했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재난을 만난 자는 롯의 처를 생각해야만 합니다(창 19:26).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8)
1)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경작지를 거처가 있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성 밖에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일터에 나갈 때는 두터운 외투는 집 안에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의복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재난의 때에는 그 겉옷을 취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을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한 것이어야 한다. 조속히 악으로부터의 확연한 분리됨, 비신앙에서 돈독한 신앙으로 돌아서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19.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9)
1) “아이 배 자들”
실로 임신한 사람과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이는 홀몸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확연한 것입니다. 이는 여자에 대한 저주도, 임신부와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날의 고통이 남을 돌볼 만큼 여유 있게 대처할 만한 것이 못되기에 미리미리 종말의 때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2) “화가 있으리로다”
여기서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은 저주 선언이 아니라 동정을 표시하는 탄식 문입니다. 즉 '아! 안되었도다'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오! 슬프도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
1)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겨울과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활동하는데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즉 겨울에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질고 식량 확보도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취약한 계절입니다.
또 안식일에는 종교적 행사에 주력해야 했으며, 율법적으로 1.8Km 이상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산으로 오른다거나 피신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께서도 바로 이러한 때에 환난 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21.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1)
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여기 제시된 '환난'은 다니엘의 내용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즉 다니엘은 '건국 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예수님 께서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2)
1)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날들' 은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를 통해 통치하는 대환난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하지'이 단어를 통해 할 수 있는 사실은 자비와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잘 드러낸 말입니다.
이에 대한 공동 번역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입니다. 여기서 그 환난의 날에 대한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마지막 날에 준비된 환난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이지 않는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육체’는 전 인류가 그 대상이 됩니다.
이는 예언의 이중성(현재, 미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공동 번역에서는 본문을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재난의 혹독성과 파괴성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이 말은 '택하신 자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환난이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환난은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택하신 자'란 '뽑혀진'의 뜻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짐승의 표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단순한 혈통적 선민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12절의 역설적인 의미처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변치 않는 믿음으로 7년 대환난을 이겨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개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교회의 파괴를 말하면서 13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기서도 세상의 환난을 가장 무섭게 묘사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환난의 예고는 멸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희망의 예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3.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3)
1) “그때에”
이 말은 앞 내용과 직접 연결되나, 곧바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시점에 과연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한편 여기서부터 35절까지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제 현상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 번째 묶음입니다. 특별히 이 세 번째 묶음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지금까지의 초점에서 발전하여 세상 종말이라는 큰 흐름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의 예언은 항상 이중적(현재, 미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을 절대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환란의 때에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5절). 자칭 메시아가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에 재난이 많을수록 더욱 기승(氣勝)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한편 본절은 5절의 표현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5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소문에 의해서 여기저기 혼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에게 안내하는 자들의 무리가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이 바빠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소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모여들 것이나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의적이 구원 개념과 유사한 절대자를 찾아다닐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재림으로 모든 것을 밝히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시고 계십니다.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24)
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교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의 권위와 이름과 능력을 도용하여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 자들이며, 거짓 선지자는 그릇된 영적 탁월성과 거짓 사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선택받은 자들조차도 속을 위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표시'(sign), '증거', '전조', '징조' 또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증명하는 각종 이적을 가리킵니다. 또한 '기사'(테라스) 역시 '경이', '놀라운 일'등의 뜻으로 '표적'과 거의 흡사한 의미이나 '표적'이 주로 인간과 관계된 외형적 증거라면 '기사'는 주로 자연 만물과 관계된 내면적 능력이나 영향력 등을 가리킵니다.
물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또한 이 같은 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도 악의적 측면에서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이 말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활동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택하심 받은 이들도 속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합니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라고 번역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의 '할 수만 있으면'이란 말은 미혹하는 이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심지어 선택받은 자도 미혹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성도들을 '반드시' 미혹시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택한 자, 곧 예수의 참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공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엡 6:10-18).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5)
예수께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은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들로 담대하게 하려고 할 뿐 아니라(요 16:4) 자기 자신에게 있는 초월적 권위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신 13:1-4 ; 요 14:29).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6)
1) “광야”
여기서는 23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광야'는 전통적인 유대 관념에 의하면 메시아 도래의 공개적 장소로 이해되었으며, 예언자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왔고 침례 요한 역시 '광야에 외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3:3).
이와 더불어 본문의 골방은 좁고 밀폐된 비밀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즉 대중적이고도 집단적인 단체나 집회에 주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밀한 개인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
주의 재림이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십니다.
1)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이 비유는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주의 재림이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돌발적인 재림 시기는 44절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25장의 비유들 속에서도 재림 시 급작성과 돌발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번개가 순식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나타나듯이 주의 재림도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3) 재림의 선명성입니다. 은밀하거나 교묘한, 그리고 모호하여 아리송한 형태로 재림하지 않고 번개의 섬광처럼 분명하고, 단호하게 모두가 공히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림에 대한 선언은 앞에서(5, 23, 24, 26절) 묘사된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의 소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거짓된 실체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5절에서 자신 있게 그리고 선언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속지 말라고 권면하셨던 것입니다(26절)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28)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많은 적그리스도와 또 적그리스도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주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온 천지가 심판으로 인한 시체로 쌓여 있을 것이고 그 시체들은 독수리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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