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마 25 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절)
1) “그 때에”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2) “천국은 마치... 같다 하리니”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3) “등”
본 단어는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합니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 받았습니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삶의 자리라고 이해하며 좋을 것입니다.
4)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갑니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합니다.
한편 잔치는 며칠 동안 계속되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집니다. 이런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됩니다. 여기서 '처녀'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 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28절 ; 눅 15:8 ;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 인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 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입니다.
2.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2)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원어상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입니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는 말은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킵니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3)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 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로 볼 수 있습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 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생활 역시 중단 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4)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
1) “신랑이 더디 오므로”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입니다.
2) “졸며 잘새”
'졸며'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잘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
1) “밤중에”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24:42-44 ;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을 설명합니다.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출 12:29).
2) “소리가 나되”
본문의 시제는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과 긴장감을 암시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입니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었습니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돌발적인 외침입니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입니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7)
1) “다 일어나”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 나 모두 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 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 없이 존재할 것입니다.
2) “등을 준비할 새”
여기서 '준비할 새'란 원어적 의미는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 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일 것입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8)
1)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여기서 '꺼져가니'는 동작의 지속성을 나타냅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 은혜의 결여,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절 등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합니다.
2)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9)
1)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합니다. 이는 분명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란 말 속에 원어상 이중의 부정어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 요 14:16).
2)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일꾼들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눅16:29).
3) “너희 쓸 것을 사라”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사 55:1 ;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입니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제공되는 것일 것입니다.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
1)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사러 간 동안에'는 문법상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합니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것임을 강력히 시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입니다.
3) “닫힌지라”
이 단어는 문법상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 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
1) “그 후에 남은 처녀들”
여기서 '그 후'란 말은 종말적 심판이 완결된 때를 가리킵니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인 것입니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입니다.
2)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주여'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입니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아무리 애원과 간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12)
본 구절에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은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의 원어상 뜻은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엄정한 선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십니다(요 10:14).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
1) “깨어 있으라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2)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가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 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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